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클랜드 전쟁 (문단 편집) === [[전쟁|제국의 역습]]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empire_strikes_back_newsweek.jpg|width=100%]]}}} || ||<#273433> {{{#f00 '''뉴스위크'''}}}[br]{{{#ff0 '''[[제국의 역습|{{{#ff0 제국의 역습}}}]]''' - '''포클랜드 사태'''[br] [[센토어급 항공모함|{{{#ff0 HMS 허미즈}}}]]가 남쪽으로 향하다}}}[br]{{{#fff (뉴스위크 1982년 4월 19일자 표지)}}} || 대처 총리는 개전을 결정했다. 영국은 아르헨티나와 [[국교단절|외교관계를 즉시 단절]]했고 [[영국 귀족원|상원]]과 [[영국 서민원|하원]]의 '''압도적인 지지'''와 함께 전쟁을 승인, 4월 5일 함대사령관(Commander-in-Chief Fleet)[* 대한민국 해군의 [[해군작전사령관]]에 해당된다.] 존 필드하우스(John Fieldhouse) [[대장(계급)|대장]]을 "코퍼레이트 작전(Operation Corporate)"으로 명명된 포클랜드 탈환작전의 총지휘관으로 임명한 뒤 해군 [[https://blog.daum.net/skdotkim/14|기동부대]]인 317.8 기동전대(Task Group 317.8)의 지휘관 존 포스터 "샌디" 우드워드(John Forster "Sandy" Woodward, 1932 ~ 2013) 해군 [[소장(계급)|소장]]과 지상군 지휘관 제레미 무어(Jeremy Moore, 1928 ~ 2007) 해병 소장에게 포클랜드 출동을 명령했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아니나, 영국군의 원수인 엘리자베스 2세는 불만족스럽다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고 한다. 자신의 차남 앤드루 왕자가 참전하게 되었으며 앞선 앤서니 이든 총리가 수에즈 전쟁을 일으켰다가 국제 역풍을 맞고 비난받았던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여왕의 입장에선 전쟁 자체를 진행하는게 굉장히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파일:external/i.telegraph.co.uk/falklands-woodward_2635669c.jpg]] ▲ 무어 [[장군]](왼쪽)과 우드워드 [[제독]](오른쪽) 사실 다른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영국군]]에서도 원정 거리 등을 이유로 전쟁에 회의적인 반응이 있었다고 한다. 쇠락할대로 쇠락한 나머지 운용 가능 전투기가 없고 공군 차원에서 여객수송이나 하는 지금 시점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우나, 1982년 당시 [[미라주 III]] 전투기 20대, [[IAI 크피르|대거]] 전폭기 30대, [[A-4 스카이호크]] 공격기 60대를 주축으로 200여대 가까운 전력을 보유한 아르헨티나 공군은 남미 최강의 공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르헨티나 해군 역시 전반적으로 현대적인 전력을 갖추진 못했으나 해군항공대 소속 스카이호크 공격기 10대를 탑재하는 한 척의 영국제 [[콜로서스급 항공모함]][* 비록 사출기가 1대뿐인 20,000톤급 항모에 전쟁 당시 30년이 넘은 중고함정이라고는 하나 썩어도 준치라고 전쟁 직전의 영국 해군이 보유한 해리어와 헬기만 운영 가능한 [[경항모]]들보다는 여러모로 나은 편이었는데 실제로 전문가들은 아르헨티나측이 순양함 격침 후에도 계속 해상에 [[항모전단]]을 배치했다면 포클랜드를 수복하려고 하던 영국측에 더 큰 피해를 주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일 정도.]과 2척의 영국제 [[42형 구축함]], [[209급 잠수함]] 두 척이 영국 기동부대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일 포클랜드에서 충격적인 데뷔전을 치르는 [[엑조세]] 대함미사일과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 5대 역시 해군 소속이었다. 반면 영국 해군이 1982년 시점에서 영국이 함대 상공에 띄울 수 있는 전투기는 [[경항공모함]] 두 척에서 발진하는 시해리어 수직이착륙 전투기 20여대 뿐이었다. 수상함과 잠수함 전력에서는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했음에도 아르헨티나군의 공습에서 상륙부대를 실은 수송선단을 지킬 수 있을지는 결코 자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F-4 팬텀 II]]만 1개 대대에 [[블랙번 버캐니어]] 공격기, 가넷 조기경보기[* 해당 조기경보기는 대잠작전용 프롭기 하부에 조기경보레이더를 단 초창기 함상 조기경보기의 일종.]까지 운용하던 중형 항모 [[오데이셔스급 항공모함|아크 로열]]만 있었어도 아르헨티나 공군의 위협 따위는 가볍게 물리칠 수 있었겠지만, 애초에 1979년 아크 로열 퇴역과 함께 함재기 대다수가 일선에서 물러나[* 블랙번 버캐니어 공격기는 살아남아서 걸프전까지도 운용됐지만 F-4의 경우에는 아크로열이 퇴역하면서 해당 기종을 운용하던 892 비행대대도 해체되고 남은 기체는 공군의 111 비행대대로 이전된 상태였다.] 아르헨티나가 영국을 우습게 보기 시작한 것이 전쟁의 원인이었으니 쓸모 없는 가정이었다. 이때 영국 정부가 느낀 위기감이 어느 정도였냐면, 대처 총리는 개전을 결정하면서 수 척의 호위함정은 물론 경항모 한 척의 손실까지도 각오했다. 기동부대 지휘관이었던 우드워드 제독은 후일 자서전에서 인빈시블을 잃는 것은 감당할 수 있지만, 허미즈의 상실은 패전으로 직결될 것으로 판단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결과를 모두 아는 현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과 달리 개전 당시 영국은 상당한 불안요소를 안고 있었고, 아르헨티나도 나름의 승산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규모 원정을 위해 좀 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남반구의 4월은 이미 겨울을 앞두던 터라 "정치적인 목적에서라도 포클랜드 탈환은 필요하며, 할 수 있다. 대신 '''포클랜드로 갈거면 지금 가야 한다'''"는 제1해군경 헨리 리치 대장의 조언을 받아들여 일단 본토와 지브롤터에 있는 전투함을 싹 긁어모으고 상선까지 징발하여 마침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점령이 길어질수록 그만큼 일대가 요새화돼 재탈환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므로 단기전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기동함대를 투입한 것이었다. 아울러 약 한 달 정도 소요되는 항해 기간 동안 외교적 해결을 시도할 경우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압박 수단으로도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대처 총리는 영국에 대한 국제 사회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외교전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먼저 아르헨티나의 침공 다음날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UN 안보리]]에서 아르헨티나를 침략자로 규정하며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미국, 영국, 프랑스가 찬성했고 중국과 소련은 기권했다. 당시 비상임이사국인 파나마만이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유럽 국가들의 대(對) 아르헨티나 수출 금지 조치를 유도했다. 대처 총리는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국의 동맹이었던 미국의 지지까지 얻어냈다. 아르헨티나가 친미적 성향이긴 했지만 미국 입장에서 아르헨티나와 영국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이빨이 빠진 사자라 하더라도 [[5개의 눈|당연히 영국을 택했다.]] 아르헨티나 측도 4월 포클랜드 제도를 점령한 직후 미국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http://www.airpower.au.af.mil/airchronicles/apj/apj02/fal02/corum.html|거부당했다.]] 아르헨티나는 '우리가 사회주의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시키고 정권을 장악한 것처럼, 만일 지지를 잃고 사회주의 정권이 재집권하게 되면 이는 남미 전체의 공산화로 이어질 것이다'라는 논리로 지지를 이끌어내려했고 미국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남미의 반공 쿠데타를 묵인 및 지지했던 터라 남미 군부 정권들과 미국은 꽤나 돈독했다.[* 이 당시 아르헨티나군 사진을 보면 미국 장비가 많다.] '''포클랜드 전쟁 기간만 제외하고.''' 당초 미국은 영국과 아르헨티나 모두와 동맹이었고 갈등이 전쟁으로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알렉산더 메이그스 헤이그 2세( Alexander Meigs Haig, Jr, 1924 ~ 2010) 당시 국무장관이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런던]]을 오가며 중재했다. 미국은 '아르헨티나 군이 철수한 후, 포클랜드 현지 주민들의 주민 투표로 귀속 국가를 결정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아르헨티나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불만을 돌리려는 침공으로 기껏 병력을 동원해서 '실지를 회복'했는데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철수하면 국민들이 외압에 굴복하는 것으로 여길까 우려했다. 또한 포클랜드 주민 대다수가 영국계로서 아르헨티나 귀속을 반대하고 있었으므로 아르헨티나 입장에서 그다지 달갑지 않은 제안이기도 했다. 결국 4월 말 미국도 영국을 공개 지지하면서 아르헨티나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를 포함한 제재안을 발표했다. 이로써 영국은 국제 사회, 특히 동맹국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아르헨티나]]가 저지른 행동이 '''빼도 박도 못하는 명백한 침략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제2차 중동전쟁]] 같이 영국에게도 구린 구석이 있었다면 모든 국가가 영국에 동조하지는 않았을 텐데 멀쩡히 잘 지내고 있는 섬을 대뜸 무단으로 점령하니 영국이 국제 사회의 지원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파일:external/www.naval-history.net/F16diplomacyMap.gif]] [[북대서양]]의 영국에서 [[남대서양]]의 포클랜드까지의 원정은 거의 [[지구]] 반바퀴를 돌아가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4월 중순에서 하순에 걸쳐 긁어모을 수 있는 선박과 항공기는 모두 동원되었다. 심지어는 호화 여객선 [[RMS 퀸 엘리자베스 2]]까지 징발하여 병력을 수송했다. [[1956년]] [[수에즈 전쟁]] 이후 오랜만에 본격적인 군사 행동에 나선 것이다. '''이렇게 [[마거릿 대처]]와 [[레오폴도 갈티에리]]는 각자의 정치생명을 건 전쟁을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